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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s 22 - 23 책장

혐오와 왜곡, 감정싸움 없이 한국사를 이야기 하는 법-심용환

hello :-) 2023. 10. 1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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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드라마틱하다. 처음에는 드라마 '연인'관련 영상을 보다가 심용환 교수님의 영상이 올라온 것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배경인 책장에 눈길이 갔는데 표지가 눈에 들어왔었다. 
  • 이전에 채널명은 기억이 안나는데 변영주 감독님과 심용환 교수님과 함께 유럽의 썰(?)들을 대화의 형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었다. 영상이 귀에 쏙쏙 잘 들어와서 봤었던 좋은 기억이 있었다. 
  • 사실 작가를 알고 책을 읽는 경우는 전작을 읽고서 만족해서 찾아 읽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드문 경우였는데 마침 내가 구독하는 yes24 북클럽에 올라온 책이어서 읽게 되었다. 

  • 이 책을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는 피하고 싶었다. 사실 한국사에서 혐오와 왜곡이 붙으면 거의 근현대사라고 생각이 들었고(정답) 보통은 혈압이 오르거나 화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사실 역사책은 좀좀따리 많이 읽는 편인데 사실 포스팅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일단 기록하게 되면 어마어마하게 손봐야 하고,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는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적극 추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남긴 점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위안부>>
-정신대 ; 여자 정신 근로령에서 나옴(1944) 여자 정신 근로령 공포
-위안부 ; 본경 동원시기는 중일전쟁부터 보고 있음(1933) 만주사변 당시 일본 설치 사실이 문서로 확인됨(1938) 국가 총동원법 이후 동원 본격화

  • 사실 정신대는 공장 노동을 비롯 일반 노동에 종사하여 위안부 문제와 거리가 있음. 
  • 성노예는 일반 명사라 사건을 명확히 인지하기 힘듬.(친일파도 민족반역자로 대체하고자 했으나 문제 역사성 간과로 친일파로 부름)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로 명칭을 통일함.
  • 위안부 문제는 1990년 부터 문제가 제기되었음.=> 여성 사학자들의 노력이 큼.(유교적이고 남성적인 시각으로 인해 개인적인 문제를 공개적으로 그 피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껴 쉬쉬함)
  • 그럼 왜 1990년대 공론화 되었나?=> 일본과 한국이 민주화 진행되면서 자민당 장기 집권이 무너지면서 과거사가 재조명+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일본 정부 자체조사+일본 언론 특종+일본 정부의 인정(김학순 할머니 증언의 영향을 받은 요시미 요시아키가 일본 방위성 문서에서 일본 정부의 조직적 개입 입증 서류 발견)
이름 연도 성격
미야자와 담화 1982.08.26. 한국, 중국은 일본의 교과서 기술에 대해 비판. 일본은 이런 비판에 귀 기울이고 정부의 책임으로 시정한다.
고노담화 1993.08.04. 위안소 설치에 옛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군의 요청을 받은 민간업자가 모집했지만. 감언, 강압 등 대체로 본이 의사와 상관없이 모집이 이루어졌다.
무라야마 담화 1995.08.15. 식민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에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여 반성의 뜻을 표하고 사과한다.
간 나오토 담화 2010.08.10. 정치, 군사적 배경으로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해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죄의 심정을 표한다. 
  • 위안부 포함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인구 500만명, 해외로 끌려간 사람 200만 명 추정. 당시 우리나라 인구 1/3 과반이 넘는 걸로 추정.
  • 위안부 문제는 인권 문제이자 여성문제, 국가 범죄임(강제동원, 성적학대,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한 범죄)=>단순 전쟁범죄가 아니라 식민범죄.(뉘른베르크재판, 도쿄 재판에서는 전쟁범죄만 다루고 있음)
  • 독일, 이탈리아, 일본 모두 포함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도 식민지 범죄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음
  • 위안부 문제는 사실 우리의 문제이자 동아시아의 문제임
  •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동남아 점령하고 미국과 싸우며 가는 곳마다 위안소 설치해 성범죄 저지름.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여성을 조직적으로 많이 동원했으나, 중국, 몽골,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네덜란드까지 동아시아 여성을 짓밟아버림)=> 1930~1945 장기 전쟁으로 군인들이 외롭고 고립감과 트라우마가 심해지자 원정 매춘부를 붙였다가 성병으로 걸머리 앓자 그거 해결하자고 인근 지역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게됨(같은시기 미국군과 영국군은 휴가제도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서 군인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만듦. 즉 돈 아끼려고.. 하... 이런 씹..)
  • 일본에서는 민간이 주도해서 속여서 돈 벌수 있다고 모집하고 빨간 구두와 옷을 보여주며 고쳤다. 폭력의 방식이 교묘하고 사악해 현지에서 납치하거나 마을 촌장을 협박해 마을 여성을 끌고 오거나 겁탈 후 끌고 오게 만들었다. (교과서에서는 굉장히 순화되고 순화되어 가르침)
  • 국민기금문제; 1990년대 일본 내부 국민모금이라는 제도로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는 하되 민간 기금 조성해 피해보상을 자율적으로 집행하려 했음.-> 배상금이 아니라 위로금형태며 총리의 사죄편지는 위로금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국, 북한, 말레이시아 동티모르는 제외됨. 또 피해자 사칭하면서 사기치는 경우도 발생함(헐레벌레 처리하려다가 흐지부지됨)
  • 1965 한일협정으로 경제개발 명목으로 정부가 일괄 3억엔 받으면서(박정희 때) 각종 피해보상을 정부가 포기함. 징용 징병, 원폭, 문화재 반출, 사할린 교포 독도문제까지 여지를 줌.
  • 해결방법 : 정부가 일괄적으로 해결하려기 보다 학계나 민간단체에서 교류를 활발히 하며 장기적 시선으로 봐야 하지만 이미 정치적인 논쟁 부분으로 넘어가버림.

<<친일파>>

  • 친일파 기준 ; 조선 총독부가 제정한 귀족원이라든지 중추원에 참여했던 특급 친일파도 있고, 식민지배 말기 일제의 전쟁 정책에 협력해 조선민중을 징용, 징병, 위안부로 내몰았던 친일파도 있고, 분야별로 분류하면 친일의 논리를 만들어냈던 지식인, 문화예술계 정재계 등 인사가 있고 개인도 있고 단체도 있음. 정부에서 펴낸 <<친일 반민족행위 관계 사료집>>에 체계 적으러 정리되어 있음. 
  • 맥아더 포고령.(미국의 입장에서 일본과 싸우고 이겨 한반도에 들어왔으나 별 관심이 없었음. 편하게 일하려고 행정 편의주의적인 발상으로 일본인 관리를 그대로 기용하려 했으나 반발로 취소됨), 즉 한반도 사정에 어두웠고 쉽게 생각해서 일본 통치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많았으나 정작 한반도 문제에 전문가가 없었음. 군정 사령관 하나 보내고 그 결과 친일파 문제뿐 아니라 농지개혁, 좌우익 갈등문제, 양심적 민족주의 세력 탄압등 온갖 문제가 발생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워싱턴 회의(1921) 때 비로소 만주에 진출했음. 이들은 정작 라틴 아메리카에 파나마를 장악해서 지배권 획득에만 생각하고 있었음-영국, 프랑스, 독일 역시 마찬가지임)
  • 만주 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시큰둥했으나 일본이 중일 전쟁 일으키고 동남아시아까지 깔딱대니까 그제야 반응했고,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도 태평양 전쟁을 승리하기 위함이었음.
  • 독일과 중국과 사정이 다른 게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라서 처벌할 수 있는 여건이 우리와 달랐음. 우리는 미국이 패전국가 관리차원으로 들어오면서 정치적 공백이 생겼음.
  • 소련이 북한지역에 들어오면서 밀어내기 식으로 진행되어 평양과 평안도에 개신교도가 집단으로 월남해 토지개혁을 빠르게 진행하고 지주나 우익들이 남한으로 도망쳐 와서 가능해짐.
  • 한민당 지도부(지금 국민의 힘 전신)의 40퍼센트 이상이 일본유학 출신, 20퍼센트 이상이 미국 유학출신이라 엘리트 정당이고 지주 정당이었음.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
  • 한민당은 그들이 살기 위해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임시정부 귀국을 위해 처음에 신경 쓴다. 여운형이나 좌익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임시정부 정통성을 들먹거림. 하지만 미군정이 승인하지 않으니 재빠르게 미군정과 결탁하는 비열한 모습을 보임.
  •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각해지니 앞장서서 반공을 외치면서 일제 통치에 순응하고 협력했던 근성이 엿보임. 민족정통성이나 사회정의 보다 권력 지향성이 모든 걸 결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
  • 게다가 미군정이 친일파를 행정령으로 흡수해 버림. 경찰의 경우 일제 강점기 제도와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여 인심이 돌아서 대구 10.1 사건, 제주도 4.3 사건이 일어남. 
  • 이승만 역시 관료와 군대, 경찰가운데 뿌리 박힌 친일파 제거보다 자신의 친위대로 적극 활용해 버림. 
  • 무엇보다 민족주의 세력이 임시정부 활동을 하느라 국내 활동을 오랫동안 하지 못하면서 국내 기반이 죽었음. 의봉길 의거를 계기로 안창호가 잡혀 죽은 것도 큰 손실이었으며 미군의 비호를 받았던 이승만도 국내세력은 기반이 없어. 결국 한민당이나 친일파 세력을 손잡으면서 부족한 국내 세력을 메웠음.=> 결국 자신의 권력 확장으로 처단보다는 친일파를 내편으로 끌어들이는 악수를 쓰게 됨.
  • 결국 이승만과 한민당이 주도하는 우익정치를 지원하며 친일파는 우익에게 없어서는 존재로 급부상하면서 반공이 곧 우익의 정체성이 되어버림. (자신들이 가진 이권과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행해왔음)
  • 국권 침탈이라는 역사적 기회를 선택한 기회주의자였던 것. 친일파의 다른 말은 기회주의자. 뭐라고 변명하든 자신의 이권을 위해 기회를 잡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 친일파 중에 엘리트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엘리트라고 친일파인 경우는 아니었음. 
  • 프랑스와 중국 타인완은 공민권 박탈이라는 제도로 친일세력을 제거해 왔음. 공민권이란 투표권을 박탈하거나 공직 취임 금지법이나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정치적 개입을 아예 단절해 버림.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 - 과거 일본식민지배에 수탈만 강조되었다면 최근들어 뉴라이트 학회를 통해 수탈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진행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함.(8.15 광복절=>건국절 로 표기함 ; 식민지 시대를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함.

- 친일파들이 일제 강점기를 통해 자본주의를 배우고,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를 물리치고 건국했다고 주장함. 경제학적으로 통계시 변화가 있는건 맞으나 정치학 역사학으로 해설없이 수치만 반복적으로 이야기 함.
식민지 수탈론 - 일제 강점기때 일제가 모든 것을 수탈해갔다고 강조함. 
  • 조선후기 ~일제 강점기 직전 ; 상권 이권 침탈
  • 강화도 조약(1876) ~ 청일 전쟁(1894) ; 일본은 청나라 상인과 경쟁하여 상권 침탈함.
  • 아관파천(1896) ~ 러일 전쟁(1904) ; 러시와 경쟁하여 이권을 침탈함.

=> 그 과정에서 조선의 상인 몰락하고 경부선, 각종 철도 광산 뺏김.

  • 사실 근대화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수량과 통계를 들이대며 경제가 성장하고 임금이 올라가고 인구가 증가한 점만 강조함. 맥락적인 분위기는 일절 언급 없음.
  • 임야 조사사업(1918) ; 한반도 임야 60%를 국유화하고, 농촌 공동체 임야 이용권을 통제하고 1942년까지 400만 정보이상의 토지를 일본에 팔아넘겨버림.
  • 토지 조사사업 ;  고종 이전에는 양전(토지 조사 사업) 사업은 관리에게 월급을 주기 위한 기초 장부의 역할이었음.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광무개혁을 통해 토지조사는 확실하게 소유권중심으로 토지를 파악하고 이를 기초로 총독부가 농업체제 전체를 파악함. (실측을 통해 면적을 정확히 파악) => 지주제를 들여와서 비료대금, 수리 조합비 같은 부담을 소작농에게 전가하여 일반 농민들에게 심각하 경제적 부담을 떠안아 버림.
  • 자본가 집단이 생겨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후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는 등 모호한 행보를 이어 나간다. 정부 정책을 압도하거나 그에 기생하여 때로는 반자본주의적인 선택까지 불사하는 기업가 정신이야 말로 식민지가 대한민국에 물려준 유산이 아닐까.. (정경유착)
  •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인 식민지 필연성과 식민지 경제성장이 입증이 되지 않음. 부득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제의 힘을 빌려 근대화했을 만큼 조선의 경제가 붕괴되지도 않았고, 일제 강점기에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던 물적인 유산이 제대로 대한민국에 계승된 것도 아니다. => 농업은 이런 논쟁거리가 많지만 결정적으로 공업 정책은 부재했고, 북부 지역에 건립된 공업지역은 전쟁을 위한 군수 시설이 주를 이룸. 조선기술자는 양성된 적 없음. 해방되면서 일본으로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조선의 산업자체가 붕괴된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산업화의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겉만 보고 내리는 결론이다. (대한민국 산업화 동력이 확보된 것은 1960년대 이후임)

<<이승만>>

  • 이승만은 독단적인 성격으로 숱한 갈등을 일으키며 독립운동 진영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두 정부에서 모두 쫓겨났는데 두 차례의 개헌으로 네 번이나 대통령이 되면서 장기 집권을 꿈꿨으나 정권 13년 동안 뚜렷한 업적을 찾기 어렵고 권력욕이 끝은 비참했다.
  • 초창기 독립협회나 <제국신문>에서 활동할 당시 많은 사람에게 각인되었고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국내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건 사실이나, 마치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서재필이 기획했고, 만인공동회를 이끌면서 제대로 된 시민단체의 면모를 드러나게 한건 윤치호였다. 그 당시 이승만은 과격하게 행동했는데 고종을 신뢰하지 않아 공화정을 모의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친일파)를 끌어들이려 하는 등 독립협회를 위기에 빠뜨리는데 일조한다. (러일 전쟁 이후 재기를 노리고 있었고, 고종은 간신히 국체를 유지했는데 박영효는 갑오개혁에 참여하면서 고종과 사이 나빠졌고, 고종을 상대로 정변을 시도하려 했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 이승만 말고도 훌륭한 기독교 독립 운동가가 많았는데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는 기독교 운동과 독립운동을 통합적으로 이어간 인물이고, 이 밖에도 김구, 김규식 모두 기독교인이다. 
  • 신재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비난했다. 독립운동을 불성실하게 했고, 무엇보다 3.1 운동 등에 보여준 민의를 무시했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수많은 갈등에 휩싸이고 그 원인의 상당수가 이승만에 있었는데, 리더십이 어디 있을까. 대통령이면서도 상하이에 머문 기간이 1년이 되지 못하고, 갈등이 심해지니까 홀연히 탈출하고, 임시정부 활동에 방해를 일삼으며 미주에서 안창호, 한길수 등과 갈등을 일으켰다. 
  • 무엇보다 비폭력 외교 독립론을 주장한다며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을 두고 살해라는 이유로 변호를 거부하고 임시정부 자금운용을 두고 심각한 갈등을 우발하며, 오죽하면 임시정부 각부 차장들이 집단 사직하며 구미위원부 폐지하고 이승만 사퇴까지 요구한다.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되어 대통령직에서 쫓겨났을 때까지 해마다 이승만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고, 1925년 반이승만 파였던 이동휘나 창조파 등은 모두 임시정부를 떠난다. 사실상 친이승만 계열이 보다 못해 쫓아냈음. 국적을 일본이라고 기입하거나 미군정이 무력을 행사하면서 좌익은 크게 위축되고,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고 하지만 1949년 남한 내 좌익 활동은 사실상 무력화된다. 
  • 해방 후 우익정치인들은 실업위기에 놓인 청년들을 선동하여 경찰은 그들 손에 무기를 쥐여줬음.
  • 미군도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면서 이승만이 요구하는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다.
  • 민간인 학살은 광범위하고 잔인하게 전개되고, 전향한 사람들의 명부를 들고 쫓아다니면서 죽였고, 낙동강 전선을 지킨다며 거창지역 도륙 냈다. 충성심을 확인한다고 북한군 옷을 입고 국민들에게 총질했다. 학살도 학살이지만 얼마나 무능하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도륙을 내면서 전쟁을 수행했을까.
  •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다.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더불어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려 12년간 헌법을 두 번이나 갈아 끼워가며 반송이라는 비명하에 수많은 저항세력을 탄압했고, 결국 4.19 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정권이 무너졌는데 개인을 찬양할 필요가 있을까. )

<<박정희>>

  • 5.16 군사 쿠데타의 배경이 되는 '정군 운동'(군대네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군인의 수를 줄이는 감군 정책을 펴면서 개혁의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 역시 사회적 분위기에 나오다 보니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 시대가 만들어 놓은 악습과 병폐를 없애려고 사회 각 분야에서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다. 군부 내 젊은 장교들 역시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마치 엄청난 혼란이 있었고, 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군부 역시 혼란의 주체였고, 그 연장선에 일어난 사건이다. 
  • 13년간 독재정권하에 있었고 특히 막판에는 억압의 정도가 심해 혁명이 일어났으니 분위기가 차분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첫해만 어수선했지 이듬해에는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로 밀어붙였음.
  • 중화학공업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유신을 강행했다는 건 유언비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1973년부터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불 소득 이렇게 홍보한 건 사실이지만 막상 유신 당시에 별 명분이 없었음. 막연하게 남북통일 운운하며 유신으로 돌입한 것
  • 엄밀히 다지면 한 개인 때문이 아니라 시민 혁명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사회가 나아갔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비롯해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 1972년 10월 17일 초헌법적인 국가 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심지어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까지 정지시켰다. 비상국무회의가 국무회의의 기능까지 떠맡겨 놓고 상황을 극단적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무력하게 만들었다. 또한 권력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이인자를 양성하고 2인자가 또 다른 2인자를 경계하고 제압하게 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묘하게 통제하면서 독재 권력을 강화했던 게 독특한 리더십이었다. 
  • 또한 젊었을 때 교사에서 군인으로, 광복군에서 남로당 조직원으로, 다시 장군에서 쿠데타의 주모자로, 유신으로 18년 독재자로 산 인물로 부도덕한 삶을 살았으며 기회주의 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 일본을 상대로 3억 달러를 받으면서 '개인 청구권'을 말살하고 이승만 정부가 20억 달러 요구하고, 제 2공화국에서는 이자를 고려해 더 높은 금액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3억달러를 받았다니.. 협상의 의지가 없었으면 차라리 중국처럼 아예 안 받고 개인의 법적 피해 보상 루트를 그대로 남겨놓았어야 했다. 최소한의 피해보상을 위한 기회를 열었어야 했는데 한일협정문에 두 번이나 '청구권이 없다.'라고 못 박아 놓았으니 인제 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 또한 한일 협정을 맺으면서 이전 조약이 '이제부터 무효'인지, 아니면 '원천 무효'인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해서 원천 무효가 아니라면 을사조약 같은 것들이 1964년까지는 유효했다는 것인데 그러면 독도의 법적 지위가 일본에 있다는 것으로 1965년 한일 협정 당시에도 합의를 못 봤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대로 독도는 지금까지도 분쟁지역이 되는 것이다. 
  • 산업화의 동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부실투성이인 데다가 부정부패로 일관했고, 정경유착의 폐해가 심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 김영삼과 김대중 정부가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다는 사실은 무리한 건설과정에 대해 지적한 것으로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박정희가 탄 차량을 제외하고 모든 차가 몇 킬로도 못 달리고 펴져버렸었다. 
  • 가장 큰 실책 ; 대한민국 산업화의 큰 방향을 결정했다면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관점에서 부실한 산업화, 그로 인해 엄청난 산업재해, 그리고 산업재해로 발생한 숱한 인적, 물적 자원 훼손 이런 변수를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했으나 모로 가도 서울만 도착하면 장땡이라는 과정보다 결과중시의 인식이 박정희 시대의 실책이다. 
  • 1970년 전태일 사건이나 1979 YH사건만 보더라도 박정희 정권의 노동 정책이 얼마나 심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그해 8월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본격화되고 임금도 대폭상승하고 1995년 민주노총도 창립되고, 1998 노사정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정부가 인정하는 데까지 온다. 

<<고조선>>

  • 몇몇 사람들의 주도로 몇 가지 전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식민사학자가 돼버리며 비난받는다. 
  • 신화가 100%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신화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역사의 사실이다.
  • 처음 고조선이 등장하는 게 고려후기,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약 30년간 싸웠고 결국 패한 시점에 '우리'와는 다른 가공할 만한 '적'앞에서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시조에 대한 고민을 역사적 차원으로 승화한다. 단순신화는 역사적 산물이다. 너무 당연한 생각인데 간과하는 측면이 크다. 
  • 13세기 이전에 단군은 평양지역 사당에 모셔진 민간신적인 자연신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풍백, 우사, 운사도 함께 내려오는데 농경사회와 맞닿아 있고, 전형적인 도교의 용어이며 단군의 할아버지 격인 환인은 비를 뿌리고 곡식을 자라게 하는 고대 인도의 신인데 불교에 수용되면서 수미산 도리천에 거주하면서 선악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건 4세기 경인데 왜 삼국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수용되는 도교와 불교의 언어가 단군신회에 버젓이 들어가는 걸까. 게다가 곰이 마늘을 먹었다고 하는데 아시아 서부가 원산지인 마늘이 고조선 당시에 있었다?=> 고려 후기의 절박한 상황도 반영되었고, 불교나 도교 같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과도 결합했고 본격적으로 조선시대를 통해 완성되었다. 
  • 청동기 유적과 유물의 시기를 맞춰보면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에 고조선이 등장한다. 적게는 800년 많게는 13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면 1000년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고조선은 무려 1000년 이상 지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유득공과 정약용은 낙랑군을 평양도 중심으로 봤고, 정약용의 경우 임둔군을 경기도 서쪽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진번군은 압록강 바깥쪽으로 보기도 한다. (유득공은 거의 1000년 만에 발해를 우리 역사로 끌어들인 인물이다.)

  • 사실 이 책의 경우는 서술방식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역사적 인식문제로 시끌시끌할 당시 나 역시도 배운 게 오래되다 보니 이게 맞나?라고 의아스러운 가짜 뉴스들을 많이 접했었다. 홍범도 장군을 빨갱이라고 하지를 않나, 이승만이 찬양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건국절이다.. 등등.. 
  • 위안부, 친일파, 식민지 근대화, 이승만, 박정희, 고조선(고대 사)에 대해 팩트와 요즘 인식되는 시점을 토론 방식으로 풀어낸다. 위안부는 역사학자와 위안부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 친일파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식민지 근대화는 경제학자, 이승만은 기독교 목사, 박정희는 박정희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큰아버지와 보수 언론에 다니는 기자와 사촌동생, 고조선은 고대학자까지.. 시점이 두 가지이니까 이 시점도 있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점에 정확한 팩트가 뭔지 알려주는데 결론은 설득되지는 않는다. (상대방이) 그게 현실적이라고나 할까..  씁쓸하지만..
  • 개인적으로는 친일파에 대한 생각을 다시 바로잡게 되었고, 기득권 친일파들의 기회주의적 모습에 신물이 나면서 역겨워서 읽다가 컨디션이 많이 하락되어서 감기에 걸린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싶다. 
  • 사실 처음에는 그냥 나 혼자 읽고 말려고 했던 책인데(주제가 주제인 만큼 내용이 방대하고 양이 많다) 정말 좋은 책이라서 심용환 교수님의 다른 책도 읽어볼 생각이다. 역사책 치고 가독성이 좋아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기회주의자적 모습이 현재 진행형이라서 더 역겹고 두 눈 부릅뜨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씁쓸하다. 
 
혐오와 왜곡, 감정싸움 없이 한국사를 이야기하는 법
1. 소통하는 역사학자 심용환이 제안하는 어른의 역사 대화 - 성숙하고 지적인 대화를 위한 한국사 교양서 《1페이지 한국사 365》, 《단박에 한국사》 등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역사 대중서로 주목받고, 방송과 유튜브에서도 종횡무진하고 있는 역사학자 심용환. 그가 일상 속 역사 대화를 돕기 위해 《혐오와 왜곡, 감정싸움 없이 한국사를 이야기하는 법》을 출간했다. 오늘날에는 자신과 유사한 관점을 가진 사람하고만 소통하며 기존 관점을 강화하는 확증 편향이 문제시되고 있다. 어떻게 자기만의 반향실, 필터버블에 갇히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단순히 혐오하는 손쉬운 길로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까? 일본군 ‘위안부’, 친일파 청산, 박정희 신드롬 등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된 논쟁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고 있다. 감정적인 반응과 맹목적 믿음, 색깔론과 적대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긴요하다. 저자는 공격적이고 감정적인 역사 인식을 넘어 더 나은 논쟁을 할 수 있도록 올바른 관점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논리적 서술로 독자에게 새로운 통찰과 실마리를 제공한다. 《혐오와 왜곡, 감정싸움 없이 한국사를 이야기하는 법》은 근현대사 ‘역사 전쟁’의 핵심 쟁점인 일본군 ‘위안부’, 친일파 청산, 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추앙과 더불어 부풀린 고대사까지 한국사의 주요 이슈 여섯 가지를 다룬다. 각 주제에 대한 논쟁을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대화로 구성해 역사 문제를 쉽고 입체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정보를 공유하며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견해 차이를 확인하며 다소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대화 속에서 독자는 어떤 것이 진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어떤 주장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지 답을 직접 찾아갈 수 있다. 이 책은 더 깊고 넓은 역사 지식을 습득은 물론이고 역사를 대하는 태도, 나와 의견이 다른 시민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까지 성찰해보게 하는 종합 ‘교양’ 도서다. “모든 역사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완전한 진리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고질적인 역사 논쟁을 어떻게 해결하고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토론과 대화가 이어져서 다양한 역사 지식이 세상에 소통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그래서 역사의 질적 진보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머리말에서 2.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여섯 가지 한국사 이슈, 정확히 알고 똑똑하게 대화하자 - 일본군 ‘위안부’,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 한국사 주요 이슈에 대해 제대로 묻고 답하다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국내 재단이 변제하는 방안을 해법으로 내놓으면서 강제동원 이슈가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제국주의 가해 역사를 희석하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한일 역사 논쟁이 심화할 조짐이다. 한편 제주 4·3 75주년을 앞두고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제주 4·3 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라고 말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근현대사와 관련해 논란이 불거지는 장면을 계속해서 마주한다. 화가 치밀고 갑갑함이 밀려올 때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역사를 해석하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일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해법일지도 모른다. 역사 지식에 대해 깊고 풍부하게 설명한 책은 많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현실적 문제에 밀착해 구성된 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거나 그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고 역사 인식을 진전시키기 쉽지 않았다. 역사는 지나간 일이자 현재도 계속되는 이야기이기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줄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이 책은 ‘대화’의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했다. 상황과 논리, 이론과 설득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대화 형식은 역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더 날 서게 벼를 수 있는 좋은 방법임이 틀림없다. 3. 모두가 같은 입장일 수 없는 우리, 화내지 않고 흥분하지 않고 토론할 수 있도록 - 더 넓고 깊은 역사 지식 습득에서 나와 의견이 다른 시민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까지 저자는 비슷한 관점을 가진 인물뿐 아니라 상반된 의견을 가진 인물도 등장시켜 역사 문제를 다각도에서 살펴본다. 기존의 역사 논쟁에서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부분을 파헤쳐 통념 속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을 밝혀낸다. 예를 들어 박정희 덕분에 잘살게 되었다고 믿는 큰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저자는 박정희 정권에서 물가와 지가가 급속도로 상승했으며, 재벌과 부유층에게만 유리한 경제구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결국 일반 국민이 누리게 될 삶의 질은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정희 시대를 화석화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한편 단편적인 사고를 벗어나 건설적인 대화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관점을 전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관점으로만 접근할 때의 한계를 짚으면서 이를 인권 문제이자 여성 문제로, 동아시아의 문제로 바라보도록 시야를 확장해준다. 더불어 보상과 사죄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피해자들의 고통에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면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여섯 가지 주제를 놓고 펼쳐지는 대화를 통해 독자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역사의식을 단단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혐오와 왜곡, 감정싸움 없이 한국사를 이야기하는 법》에 등장하는 대화를 따라가며 어떤 것이 더 역사의 진실에 가까운 주장인지 독자 스스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한국 근현대사 입문자에게 권하는 쉽고 입체적인 역사 공부 -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건너는 어른과 청소년을 위한 교양 한국사 학창 시절에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뭐였냐고 묻는다면, 짐작건대 ‘역사’가 수위를 차지할 것이다.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방대한 분량을 공부해야 하고, 그 주된 공부법이 암기라는 편견이 강한 과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마주할 때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오늘의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다시 역사책을 찾는 이들이 많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는 가장 가깝고도 가슴 아픈 역사이기에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무엇보다 제대로 알아야 할 역사다.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 역사에 관한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이에 대해 속 시원히 대화하고 토론하고 싶었던 독자가 많을 것이다. 《혐오와 왜곡, 감정싸움 없이 한국사를 이야기하는 법》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자주 반복되는 역사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쉬운 입말로 정리했으며 최근의 연구 결과를 포함한 객관적 사료로 정확성을 더했다. 또한 세계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국제 관계에 따른 지정학, 비교사적 접근법 등도 소개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한국사에 대한 입체적이고 균형 잡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를 거듭해가며 어린이부터 청소년, 성인까지 남녀노소 모두와 두루 소통하고 있는 역사학자 심용환의 ‘역사 대화 가이드’와 함께 한국사를 더 깊이 알아가고,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을 키워가기를 바란다. ※이 책은 《심용환의 역사 토크》 개정판입니다.
저자
심용환
출판
휴머니스트
출판일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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